럭셔리 시대의 마지막 오해, 그리고 2025년의 파이프라인
패션하우스가 트렌드를 ‘선포’하던 시대는 끝났다. 오늘의 트렌드는 하우스에서 점화되고, 크리에이터가 생활 맥락으로 번역해 확산시키며, 커뮤니티가 장기 열을 유지한다. WPP 산하 인플루언서 마케팅 에이전시 Goat의 패션 특집 팟캐스트는 이 삼각 구조를 촘촘히 보여준다. 그러나 대담을 그대로 옮기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마케터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 바뀌었는가”가 아니라 “그 변화가 미디어·크리에이티브·측정·오퍼레이션을 어떻게 바꾸는가”다. 이 글은 팟캐스트 속 논지를 세 가지 실무 가설로 다시 세운 뒤, 각 가설을 검증하는 사례와 실행 프레임으로 번역한다.

첫째 가설은 권력의 재배치다. 명품 로고의 카리스마가 소비를 견인하던 구도에서, 지금은 스토리와 문법의 다양성이 의사결정을 지배한다. 하우스는 여전히 무드보드와 룩을 만든다. 그러나 대중 언어로의 번역 권한, 다시 말해 문법을 재구성하는 권한은 크리에이터에게 넘어갔다. 플랫폼 상의 수많은 ‘렌즈’가 같은 오브제를 각자의 미감으로 해석하면서, 하나의 룩은 수십 개 생활 맥락으로 분할되고 또 재조립된다. 런던 패션위크가 더 이상 밀폐된 쇼룸이 아니라 라이브·숏폼·Vlog가 동시에 교차하는 제작 현장으로 인식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마케터에게 이는 프런트 로를 채우는 일보다, 사전·현장·애프터를 잇는 콘텐츠 수확 파이프라인을 설계하는 일이 우선이라는 시그널이다. 초청 인플루언서 몇 명의 ‘착석’보다, 각기 다른 커뮤니티를 대표하는 여러 명의 ‘해석’을 한 이벤트 안에 동시다발적으로 배치할 때 파급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둘째 가설은 스토리의 경제성이다. 명품 백을 ‘소유’하는 동기는 약해졌고, 브랜드의 서사에 ‘참여’하는 보상이 커졌다. 작은 브랜드가 의외의 성과를 내는 배경에는 생산 과정의 투명성, 디자이너의 세계관, 협업의 맥락을 생활 언어로 풀어내는 서사력이 있다. 크리에이터는 이 서사를 증폭하는 단순한 앰프가 아니라, 서사의 화법을 바꾸는 번역가에 가깝다. 고가의 백참 트렌드가 합리적 가격대의 대체재로 급속히 확장되는 식의 파급은 크리에이터의 생활 맥락 편집이 만들어낸다. 이 관점은 패션 바깥에서도 유효하다. 식음료 신제품을 ‘스타일링 놀이’로 연결하는 브리프는 전혀 이질적으로 보이는 카테고리를 자연스럽게 접속시킨다. 중요한 것은 제품의 전면 배치가 아니라, 크리에이터 고유의 포맷을 존중하며 ‘은근하게 스며들게’ 만드는 설계다. 동일한 예산으로 유명인 한 명을 기용하는 것보다, 서로의 피드를 읽고 영향을 주고받는 동년배 크리에이터 묶음을 설계하는 편이 네트워크 효과가 크다.
셋째 가설은 측정의 전환이다. 도달과 조회는 더 이상 캠페인의 목적이 아니라 전제다. 의미의 교환이 있었는가, 맥락의 이해가 깊어졌는가, 커뮤니티 내부에서의 호감과 재생산이 이루어졌는가가 성과를 가른다. 댓글의 문장과 공유의 이유, 저장의 상황이야말로 오늘의 북극성 지표다. 허영 지표에서 관계 지표로의 이동은 단지 리포트 포맷 변경의 문제가 아니다. 누구를 기용하고 어떤 포맷을 우선 배치할 것인지, 크리에이티브의 컷 편집을 어디에 맞출 것인지, 이벤트를 언제 라이브로 ‘뽑아’야 하는지 같은 운영 판단 전반을 바꾼다. 팬덤이 얇은 매스 크리에이터보다, 특정 신(scene)에 깊숙이 뿌리내린 크리에이터가 꾸준히 높은 호감을 이끌어내는 장면은 그 자체로 지표 체계의 변화를 요구한다.
세 가지 가설이 사실이라면, 실무는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 먼저 미디어 플래닝은 도시 단위에서 신·구역 단위로 재편해야 한다. 서울의 미니멀 유니폼, 도쿄의 큐레이션된 과잉, 런던의 소호와 브릭레인의 대비는 같은 국가 안에서도 전혀 다른 문법을 요구한다. 이질적 커뮤니티를 한 화면에 섞는 대신, 각 커뮤니티에 맞는 크리에이터를 티어드 구조로 배치하고, 동일 오브제를 각자의 언어로 해석하게 하는 방식이 효율적이다. 다음으로 크리에이티브는 ‘정답을 보여주는’ 데서 ‘정답을 함께 찾는’ 형식으로 이동해야 한다. 사전 티징, 현장 스니펫, 애프터 하이라이트와 인터랙션을 하나의 연속된 서사로 묶고, 각 지점에서 다른 크리에이터가 바통을 이어받게 하라. 이벤트는 하루로 끝나지만, 콘텐츠의 수확은 사전 일주일과 사후 일주일에 걸쳐 진행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마지막으로 오퍼레이션은 분업이 답이다. 인사이트·전략·크리에이티브·운영의 역량을 억지로 한 팀에 묶기보다, 전략팀이 플랫폼 문화권과 니치 문법을 분해해 제안서에 이식하고, 운영팀이 현장에서 데이터 기반으로 변주·증폭하는 체계를 갖춰야 한다. “모두가 다 한다”는 만능주의는 속도를 늦추고 깊이를 얕게 만든다.
브랜드의 용기는 여전히 병목이다. 많은 조직이 “혁신을 원한다”고 말하지만 막상 과감한 아이디어 앞에서는 안전지대로 회귀한다. 혁신의 기준은 각 브랜드의 출발선에 따라 다르다. 인플루언서를 이제 막 시험하는 브랜드에게 새로운 플랫폼 진입은 충분히 혁신적이다. 반대로 소셜 실험을 누적해온 브랜드에게 혁신은 문화권을 찌르는 캐스팅이나, 포맷 자체를 비트는 내러티브 설계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초기에 정의한 위험 한계를 합의하고, 실행 단계에서 그 합의를 지키는 일이다. 무난한 백만 뷰는 잊히지만, 문화적 적합성이 높은 낯섦은 회자된다. 때로는 ‘관련성 없는 관련성’, 즉 예상 밖이지만 맥락적으로 정확한 캐스팅이 결정타가 된다.
AI와 가상 인플루언서는 어떻게 봐야 할까. 크리에이터를 대체하는 주체라기보다, 아이데이션과 제작 효율을 높이는 증강재로 보는 시각이 현실적이다. 질문의 출발점을 던지고 변주를 유도하는 보조엔진, 컷 편집의 후보를 빠르게 뽑는 도구로서 AI는 유용하다. 다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를 구축하는 ‘관계 노동’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스폰서십 답변, DM으로 이어지는 구매 상담, 현장 라이브의 돌발 인터랙션은 알고리즘이 아니라 인격이 만든다. 스케일을 키우되, 관계의 촉감을 잃지 않는 균형이 관건이다.
이 모든 변화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파이프라인이다. 프런트 로에 누가 앉느냐가 아니라, 누가 언제 무엇을 어떻게 어디로 흘려보내느냐가 중요하다. 사전 일주일은 맥락을 쌓고, 당일은 해석을 동시다발로 생산하며, 사후 일주일은 대화를 관리한다. 이때 대화의 단위는 조회가 아니라 문장이고, 공유의 이유이며, 저장의 순간이다. 도시의 구역과 커뮤니티의 신을 매체 단위로 인정하고, 그 신을 대표하는 크리에이터를 언어권처럼 다루는 계획이 필요하다. 결국 패션은 몸의 언어이고 마케팅은 그 언어가 사회로 번역되는 과정이다. 하우스가 어휘를 만들고, 크리에이터가 억양을 붙이며, 커뮤니티가 관용구를 만든다. 2025년 이후의 승자는 멋진 어휘를 많이 가진 브랜드가 아니라, 억양과 관용구가 사회에 퍼지도록 파이프라인을 설계하는 브랜드일 것이다.
한국 시장에 대입하면 메시지는 더 선명해진다. 서울의 미니멀 유니폼과 지방 도시의 기능성 아웃도어 미감, 럭셔리 리세일을 일상화한 Z세대의 경제성 감각이 동시에 존재한다. 글로벌 하우스의 무드를 그대로 수입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로컬 신과 커뮤니티의 언어로 재번역하는 체계가 필요하다. 품목별로는 러닝·하이킹·여행 등 기능적 맥락이 강한 카테고리와의 크로스가 특히 유망하다. 착장 그 자체보다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하며’ 입는가의 내러티브가 구매를 밀어준다. K-패션 브랜드에게는 생산·제조·지속가능성, 더 나아가 지역 기반 협업의 스토리를 생활 언어로 풀어줄 크리에이터 파트너가 핵심 자산이 된다.
결론은 명쾌하다. 브랜드가 더 잘 보여야 하는 시대는 지나가고, 브랜드가 더 잘 ‘흘러야’ 하는 시대가 왔다. 파이프라인은 자동으로 생기지 않는다. 도시의 구역과 커뮤니티의 신을 단위로 삼아 크리에이터를 언어권처럼 설계하고, 사전·현장·사후의 수확 창을 열며, 허영 지표 대신 의미 지표를 북극성으로 삼는 조직만이 내일의 트렌드를 오래 붙잡을 수 있다. 프런트 로의 좌석 배치가 아니라, 파이프라인의 유량과 유속을 설계하는 것. 그것이 2025년 크리에이터 마케팅이 패션에 남긴 가장 실무적인 교훈이다.